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분할 (문단 편집) == 1차 분할(1772년)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 1763년 [[아우구스트 3세]]가 사망하자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미 연방은 [[동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한 뒤였고, 게다가 [[아우구스트 2세]] 대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입김은 점차 강해져 스타니스와프가 왕위에 오른 1760년대 쯤 되면 폴란드는 러시아의 반식민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장 스타니스와프 2세부터가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의 영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선출되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영국]]식 [[입헌군주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관세]] 제도를 도입하고 세제를 개혁하는 등 쓰러져가는 조국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는 폴란드를 자신들의 젖소쯤으로 생각했던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러시아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른 스타니스와프 2세를 아니꼽게 생각한 일부 반러시아 귀족들이 바르 연합을 조직, 반러시아 봉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스타니스와프 2세가 이루고자 했던 개혁은 중단되고 스타니스와프 2세는 [[러시아 제국군]]과 손을 잡고 이 봉기를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폴란드 남쪽에 위치한 [[크림 칸국]]을 두고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러시아-튀르크 전쟁(1768~1774)]]에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승기를 잡자 동유럽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전쟁 후반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가 노리고 있던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을 침공하여 점령하기도 했고, 러시아의 팽창은 오스트리아에게도 위협적인 일이라서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고려할 정도였다. [[프랑스 왕국|프랑스]]의 경우에도 유럽의 [[패권]]을 주장할만큼 강해진 나라는 일단 다함께 치고 본다는 유럽의 전통에 입각하여 오스만 제국을 지원해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모두 얼마 전의 [[7년 전쟁]]에서 너무 많은 국력을 소진했던터라 큰 전쟁을 또 일으킬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전쟁 대신에 외교적 수완을 발휘해서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에 저항할 수 있도록 여러 국가의 국경선을 조정한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여기에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와중에 빼앗은 [[슐레지엔]]의 일부를 오스트리아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이 들어있어 프로이센도 이 문제에 얽혔다.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엄청난 피를 흘려가며 차지한 이 땅을 내주고 싶지 않았다. 한편 7년 전쟁 이후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견제하기 위한 군사 동맹을 맺어두었기 때문에, 만약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로이센이 자동으로 참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7년 전쟁에서 국토가 초토화 되었던 프로이센의 입장에서 또 다른 전쟁에 끌려들어가는 것도 달갑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래서 이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프로이센이 후술할 과정을 거쳐서 폴란드를 [[희생양]]으로 하는 평화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 1차 폴란드 분할이다. 이를 통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 대신에 폴란드로 진출하게 해서 살아난 오스만이 두 나라를 견제하게 하고, 동시에 이전에 슐레지엔을 잃은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에게서 더이상 영토를 빼앗지 못 하는 러시아를 달래려는 것이었다. 1769년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왕국]]의 세페시(Szepes)주[* 지금은 [[슬로바키아]] 영토이다.]에 있던 폴란드의 [[월경지]]를 무단으로 합병하면서 삼국 분할의 포문을 열었다. 그 지역은 1412년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지기스문트|지그몬드]]가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을 위해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에게 전쟁 자금으로 60그로셴 은화 37000개([[은|순은]]으로 약 7톤)를 빌리는 조건으로 세페시주에서 소금이 많이 나는 16개 마을을 담보로 넘겼으나 돈을 갚지 못해 폴란드 영토가 된 곳이었다. 그리고 거의 360년이 지난 1769년 폴란드에서 바르 연합의 반러시아 봉기가 터지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봉기로부터 지역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 지역을 합병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주러시아 프로이센 대사로 있던 프리드리히의 동생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공한테 오스트리아의 도발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 일부를 합병할 것을 제안했는데 하인리히는 이 제안을 형에게 알렸고 프리드리히는 이 제안을 수정하여 3국이 폴란드 영토를 분할하고 그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에게 가장 큰 몫을 주겠다고 오스트리아에게 제안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지엔을 돌려주면 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 일부를 합병하는 것을 묵인해주겠다고 역제안을 했지만 프리드리히는 거절하였다. 그 와중에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도중 몰다비아와 왈라키아까지 침공하면서 급속히 세력을 확장해가는 러시아의 위협이 현실화되고 때마침 바르 연합이 반러시아 봉기를 일으키면서 러시아는 폴란드를 보호령으로서 남겨둘 가치가 사라졌다고 판단, 직접 봉기진압에 나서기 시작한다. 하인리히 공은 러시아가 폴란드와 오스만 양면으로 세력을 확장하면 3국 간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므로 러시아가 오스만 방면으로 진출하지 않는 대신 3국이 사이좋게 폴란드를 분할하면 3국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가 되므로 바르 연합이 일으킨 봉기 진압에 개입할 것을 프리드리히와 [[마리아 테레지아]] 두 사람에게 주장한다. 여기에 두 사람이 동의하면서[*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의 나라를 갈라먹자는 철천지 원수 프리드리히의 제의를 쉽게 받아들이자 프리드리히는 마리아 테레지아더러 "울고 또 울었지만 이득을 얻을 수 있으면 최대한 얻었다"고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사실 폴란드 분할을 주도한 건 아들 [[요제프 2세]]와 재상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지만, 허구헌날 다투던 아들의 결정에 태클을 안 걸고 묵인한 걸로 보아 사실상 제의에 찬성한 것이다.] 1771년 11월 바르 연합의 스타니스와프 납치 시도를 빌미로 3국은 폴란드에 개입하고 봉기 진압이 끝난 1772년 2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오스트리아)|빈]]에서 3국이 폴란드 분할에 합의하면서 폴란드의 분할은 현실화되었다. 그렇게 1772년 8월 3국은 동시에 폴란드-리투아니아 땅으로 쳐들어와 협정에서 정한 대로 각자의 몫을 챙기기 시작했다. 분할하기로 한 지역의 도시, 마을, 요새 등에 3국의 깃발이 걸리는 상황. 일부 군대가 저항을 시도해 봤지만 헛수고일뿐이었다. 1772년 8월 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3국은 정식으로 폴란드 분할 조약에 서명했다. 폴란드는 어떻게든 저항을 해보려 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스타니스와프 2세는 서유럽의 열강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들도 제 코가 석자인지라 무시해버렸고 3국의 군대는 [[바르샤바]]를 점령한 후 조약을 승인할 세임을 소집하지 않을 경우 바르샤바를 박살내 버리겠다고 협박을 가하고 뇌물을 쳐먹은 귀족들은 조약을 승인하자고 땡깡을 부리니 결국 9월 22일, 세임은 3국의 폴란드 분할 조약을 승인했다. 마지막으로 1773년 9월 18일, 폴란드와 3국은 양도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는 빼앗긴 지역에 대한 권리를 모두 포기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lish-Lithuanian_Commonwealth_1773-1789.png]] 조약에 따라 3국은 각자 나름대로 제 몫을 챙겼다. 우선 프로이센은 [[서프로이센|왕령 프로이센]]의 대부분과 노테츠 강 유역의 대폴란드 북부와 쿠야비 북부 일대를 점령했다.[* [[그단스크]]와 [[토룬]] 제외. 하지만 이 두 곳도 곧 있을 2차 분할 때 차지했다.] 프로이센이 차지한 몫은 3국 중 가장 적은 몫(영토와 인구 모두 가장 적었다)이었지만 전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동안 프로이센의 영토는 중간에 폴란드 땅이 끼어 있어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본토와 [[동프로이센]]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이 중간 지역을 폴란드로부터 빼앗으면서 두 영토를 육로로 연결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 지역은 [[발트해]] 연안에 있어서 폴란드의 해외 교역량 중 80% 이상을 담당하던 곳이라 프로이센은 폴란드의 해외 무역을 사실상 봉쇄할 수 있게 되었고 폴란드산 물건에 높은 세율의 관세를 물리면서 폴란드의 경제적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거기에 [[서프로이센|왕령 프로이센]]을 폴란드 분할을 통해 차지함으로써 대외적으로는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로 칭하던 프로이센의 군주가 프로이센 국왕으로 탈바꿈되었다. 오스트리아는 3국의 폴란드 분할에 가장 관심이 없었지만 차지한 지역은 가장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차토르와 [[아우슈비츠]], 소폴란드 일부[*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 제외.]와 [[갈리치아]] 전역 그리고 비엘리츠카 소금 광산 또한 오스트리아가 차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재상 카우니츠 모두 이번 분할로 얻은 땅을 프로이센에게 자국의 세수 22%를 차지하던 [[슐레지엔]]을 잃은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으로 여겨 만족해 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처음에 툴툴거린 건 마리아 테레지아의 도덕주의적 경향도 있지만, 상실한 슐레지엔에 대한 집착도 한 이유였다. 폴란드에서 강탈한 땅을 가지고 프로이센에 딜을 해서 슐레지엔을 되찾으려 했지만, 슐레지엔을 돌려주지 않으려고 폴란드를 분할한 프리드리히인데 들어줄 리가... 별 수 없이 폴란드 분할에 만족한 것. 본인의 도덕주의의 일부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외교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보수적인 성향이 확고했고, 전 시대 17세기 [[30년 전쟁]]이나 [[제2차 빈 공방전]] 같은 역사적 순간에 폴란드가 같은 가톨릭 맹방으로서 여러차례 지원해준 점을 기억하며 --실제론 프리드리히의 일침 그대로 꿀떡하면서도-- 전통적인 우방국에 대한 뒷치기로 봤다. 후대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이런 마리아 테레지아의 도덕주의와 가톨릭을 탄압하고 동화정책을 펼친 [[포젠|독일]][[서프로이센|령]], [[프리비슬린스키|러시아 제국령 폴란드]][* 이 시기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주 종교는 [[개신교]]였으며, 러시아 제국의 주 종교는 [[러시아 정교회]]였다.]의 경우를 보라며 [[폴란드인]]에게 오스트리아 통치의 당위성을 어필하곤 했는데, 관점이야 어쨌든 명분 만큼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에 문화적, 정치적 차원에서 폴란드인의 광범위한 자치가 보장되긴 했고,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령 [[크라쿠프]](크라카우), [[르비우|르부프]](렘베르크)는 러시아, 독일령 폴란드에서 망명온 논객들이 주도한 폴란드 민족주의의 기반 지역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쯤 되면 분할국 3국 사이 폴란드인들은 농민,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그나마 산업화가 되어있는 러시아령 바르샤바, 독일령 포즈난 일대로 대거 이주하는 반면 지식인, 전통 지주층은 정치적 자유를 위해 오스트리아령인 르부프, 크라쿠프로 이주하는 경향을 띈다. 러시아는 3국 중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했지만 대부분이 개발이 덜 되고 경제적으로도 중요치 않은 북동부 지역이었다. 드비나 강, 드루트 강, [[드네프르 강]]을 따라 그어진 경계선 이동의 전역, 폴란드령 [[리보니아]](Województwo inflanckie)로 알려진 [[라트갈레]], [[벨라루스]] 북동부 지역을 차지했다. 러시아는 이 지역들을 차지함으로써 러시아 본토가 더욱 안전해졌으며 폴란드의 대 러시아 방어력을 상당부분 상실시키는데 성공했다. 3국의 분할 결과 연방에서 떨어져나간 지역은 21만 1천 km^^2^^, 인구는 약 453만 명이었다. 영토의 약 30%, 인구는 1/3을 넘는 엄청난 수치였다. 폴란드인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연방의 수족을 잘라버린 조약 때문에 조약을 승인해버린 귀족들은 바로 [[버로우]]하게 된다. 한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통적인 동맹국이었던 프랑스는 이를 방관했다. 당시 국왕 [[루이 15세]]의 왕비가 폴란드의 공주였음에도 말이다. 이는 [[동맹의 역전]]으로 오스트리아도 프랑스의 혼인동맹국이 된 것에 기인한다. 오스트리아도, 폴란드도 동맹국인 상황에서 프랑스와 루이 15세는 무리하게 다 무너져가는 폴란드와의 의리를 지켜 3국을 모두 적으로 돌리기보다 새로운 혼인동맹국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았기 때문에 프랑스는 3국 분할에 대해 중립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왕태손 시절에 이를 목격한 [[루이 16세]]는 자신의 처가이기도 한 오스트리아의 확장정책에 실망했다. 안 그래도 유약한 성격이었던 그는 내부적인 재정문제까지 겹쳐지면서 유럽 대륙의 현상유지에 주안점을 두게 되고, 이는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기대와 달리 중립을 선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